맨위로가기

후지와라노 미치카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후지와라노 미치카네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으로, 984년 가잔 천황의 즉위와 함께 구로도(蔵人)에 임명되었다. 그는 가잔 천황의 출가를 돕고, 이치조 천황의 즉위에 기여하여 승진을 거듭, 내대신과 우대신을 역임했다. 형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관백으로 임명된 후에도 승진을 계속했지만, 미치타카 사후 995년 관백에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여 '7일 관백'으로 불렸다. 사후 정1위 태정대신으로 추증되었으며, 그의 가계는 우츠노미야 씨로 이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961년 출생 - 구준
    구준은 북송 시대의 인물로, 과거 급제 후 뛰어난 연설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송 진종의 친정을 주장하여 전연의 맹을 맺는 데 기여했으며, 재상으로 복직했으나 모함으로 좌천되어 유배되었고,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다.
  • 961년 출생 - 최사위
    최사위는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목종, 현종, 덕종 때 벼슬을 지내 거란 침입을 막는 데 기여하고 흥료국 문제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으며, 내사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고 추충좌리동덕공신호를 받았으며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 구조류 - 후지와라노 아키미쓰
    후지와라 북가 출신의 헤이안 시대 공경인 후지와라노 아키미쓰는 대신을 역임했으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의 갈등과 정치적 실수, 딸 관련 사건 등으로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지만, 조정에 기여한 공로와 유소쿠코지쓰에 대한 지식은 재평가되기도 한다.
  • 구조류 - 후지와라노 가네이에
    후지와라노 가네이에는 헤이안 시대 공경으로, 엔유, 가잔, 이치조 천황 시대에 재상을 지내며 이치조 천황의 외조부로서 섭정이 되어 후지와라 씨의 권력을 강화하고 가잔 천황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후지와라노 미치카네
기본 정보
씨명후지와라
이름미치카네
다른 이름아와타도노, 니조도노, 마치지리도노, 아와타 간파쿠, 나노카 간파쿠
시대헤이안 시대 중기
출생오와 원년 (961년)
사망초토쿠 원년 5월 8일 (995년 6월 8일)
관위정2위, 간파쿠, 우대신
추증정1위, 태정대신
주군엔유 천황가잔 천황이치조 천황
씨족후지와라 북가구조류
부모아버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 어머니: 후지와라노 도키히메
형제미치타카, 초시, 미치쓰나, 미치쓰나모의 양녀, 미치카네, 센시, 미치요시, 미치나가, 스이시, 가네토시
배우자후지와라노 도오카즈 딸, 후지와라노 시게코 (후지와라노 모로스케 딸), 후지와라노 구니미쓰 딸
자녀후쿠아시 기미, 손시, 가네타카, 가네쓰나, 가네노부, 니조도노노미카타, 나이시노쓰보네

2. 경력

에이간 2년(984년) 정월에 오위구로도에 보임되었고, 8월에 가잔 천황이 천조하였지만 미치카네는 계속 구로도를 맡았고, 10월에는 좌소벤도 겸했다.

가잔 천황조에서는 외척(숙부)인 권중납언·후지와라노 요시카이가 천황을 보좌하여 조정을 영도했다. 한편, 춘궁에는 미치카네의 동모 여동생 후지와라노 센시 소생의 가네히토 친왕이 세워져 있었고, 미치카네의 아버지인 우대신 후지와라노 가네이에는 외손자인 가네히토 친왕의 조기 즉위를 바랐다. 가잔 천황은 정서적인 성격으로, 총애하던 여어 후지와라노 시시가 죽자 깊이 슬퍼하며 고민하게 되었다. 구로도로서 측근에 있던 미치카네는 겐케이지 (가잔사)의 겐큐와 함께 불교의 가르침을 설하고 출가를 권했다. 미치카네도 출가할 것을 약속하자 천황도 그 마음이 되었다.

칸와 2년(986년) 6월 23일 축시에 미치카네는 가잔 천황을 몰래 내리에서 데리고 나왔다. 미치카네는 천황이 도중에 발길을 멈추려고 하자 달래서 어떻게든 야마시나의 겐케이지까지 데려왔다. 천황은 겐큐에게 계를 받고 삭발했다. 그런데 미치카네는 "아버지에게 출가 전 모습을 한 번 보여주고 출가를 고한 뒤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다"라고 말하고, 절에서 떠나버렸다. 천황은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었고, 궁중에서는 가네이에와 형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신제 천조의 준비를 재빨리 마쳤다. 다음날 아침, 요시카이와 권좌중변 후지와라노 고레나리가 겐케이지로 달려갔지만, 출가한 천황의 모습을 보고 절망하여 그들도 출가했다(칸와의 변).

어린 가네히토 친왕이 천조(이치조 천황)하자, 외조부인 가네이에가 섭정에 취임했다. 공로자인 미치카네도 같은 날 구로도노토에 임명되었고, 7월에 종4위하·산기, 10월에는 종3위·권중납언, 11월에 정3위에 서임되는 등 급속히 승진을 이루었다. 다음 에이엔 원년(987년) 선임 중납언인 미나모토노 시게미쓰·미나모토노 야스미쓰·후지와라노 기미스에를 넘어 종2위에 서임되었고, 에이소 원년(989년)에는 마찬가지로 선임 중납언인 후지와라노 아키미쓰를 넘어 정2위·권대납언으로 진출했다.

쇼랴쿠 원년(990년) 후지와라노 가네이에가 병으로 쓰러져 죽자, 후임 관백에는 장형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임명되었다. 가네이에가 측근들에게 후계자를 상담했을 때, 후지와라노 아리쿠니는 이치조 천황 천조의 공을 이유로 미치카네를 천거했지만, 다이라노 고레나카와 다노쿠니노 헤이가 미치타카를 천거했기 때문에, 가네이에가 고레나카 등의 의견을 채택했다고 한다(『강담초』). 이에 대해 미치카네는 아버지에 대한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자신이 관백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바랐는데, 미치타카가 후계로 선택된 것을 매우 미워하여, 아버지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모아 유흥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대경』)[6]

그러나 미치타카 집정 하에서도 미치카네의 승진은 계속되어, 쇼랴쿠 2년(991년) 내대신, 쇼랴쿠 5년(994년) 우대신으로 진출했다.

초토쿠 원년(995년) 관백 미치타카는 중병에 걸려, 후계 관백으로 적남 내대신 후지와라노 고레치카를 바라지만 허락되지 않고, 4월 10일에 사망했다. 반 달 정도의 섭관 부재를 거쳐, 4월 27일에 미치카네는 관백 선하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치카네는 병이 나서, 5월 8일에 사망했다. 향년 35세. 재임 기간은 불과 10여 일이었고, 세상에서는 "칠일 관백"이라고 불렸다. 사후, 정1위태정대신을 추증받았다. 병중의 미치카네가 관백으로 임명된 배경에는 "관백은 형제 순으로"라는 선례를 만들어 미치카네 다음에 미치나가 관백이 되도록 하려는 황태후 센시의 관여가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3]

또한, 이 4월부터 5월에 걸쳐서는 미치타카·미치카네 형제 외에도 좌대신 미나모토노 시게노부, 대납언 후지와라노 스미토키·후지와라노 아사미쓰·후지와라노 미치요리, 중납언 미나모토노 야스미쓰·미나모토노 이즈쿠 등 8명의 의정관이 병사했다. 쇼랴쿠 4년(993년)경부터 다자이후에서는 두창이 대유행하고 있었고, 쇼랴쿠 5년경부터는 전국적인 대유행이 되었다. 이치조 천황도 감염되었고, 미치타카를 제외한 공경들의 사인도 두창이 원인으로 보인다. 『영화이야기』에서는 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고레치카의 외조부 다카시나노 나리타다에 의한 주술이 암시되어 있다。

미치카네의 관백 시기는 짧았지만, 한 번 진정이 개최되었다。또한, 가신 후지와라노 아리쿠니가 위독해진 미치카네에게 후임 관백을 지명한 양장을 쓸 것을 권했지만, 관백은 양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미치카네는 거절했다(『강담초』)。


  • 덴엔 3년(975년) 정월 7일: 종5위하(레이제이 원 어급)
  • 텐겐 2년(979년) 12월 2일: 시종
  • 텐겐 3년(980년) 날짜 불명: 승전
  • 텐겐 6년(983년) 정월 27일: 탄정소필
  • 에이칸 2년(984년) 정월 10일: 오위구로。8월 25일: 종5위상(레이제이 원 어급). 8월 27일: 오위구로(카잔 천황선조)。10월 10일: 정5위하(동궁 어급)。10월 30일: 좌소변
  • 칸와 2년(986년) 6월 23일: 구로도노 (양위일)。7월 5일: 종4위하(입후일)。7월 16일: 우근위권중장。7월 20일: 참의, 우근위중장 여원。8월 13일: 겸미마사카 곤노카미。10월 15일: 종3위, 곤츄나곤。11월 22일: 정3위
  • 칸와 3년(987년) 11월 11일: 종2위 (지난 8월 이와시미즈 행행 행사상)
  • 에이소 원년(989년) 2월 23일: 곤다이나곤。3월 4일: 겸황태후궁대부 (황태후・후지와라 노 센시)。4월 5일: 정2위 (카스가 행행 행사상)
  • 에이소 2년(990년) 6월 1일: 겸우근위대장。7월 2일: 복해(부)
  • 쇼랴쿠 2년(991년) 9월 7일: 내대신。9월 9일: 우근위대장 여원
  • 쇼랴쿠 5년(994년) 8월 28일: 우대신。9월 7일: 우근위대장 여원
  • 조토쿠 원년(995년) 4월 27일: 관백。4월 28일: 후지와라 씨 장자。5월 2일: 신경하。5월 8일: 훙거。5월 25일: 증태정대신정1위

2. 1. 칸나의 변 (986년)

에이간 2년(984년) 8월, 카잔 천황이 즉위하면서, 미치카네는 쿠로우도 사쇼벤이 되었다. 카잔 천황은 카네이에의 사망한 형 코레타다의 딸 카이시가 생모이며, 코레타다의 아들 곤츄나곤 요시치카가 천황을 보좌하며 조정을 맡았다. 이 때문에, 카네이에는 야스히토 친왕의 조속한 즉위를 바라고 있었다. 카잔 천황은 정서적 성격으로, 총애하던 뇨고 후지와라노 시시(忯子)가 사망하자, 깊은 탄식과 고민에 빠졌다. 쿠로우도로서 근시하던 미치카네는 간케이지 (카잔지)의 엄구와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출가를 권했다. 미치카네도 출가할 것을 약속하면서 천황도 그럴 마음을 먹었다.[2]

간나 2년(986년) 6월 23일 축시, 미치카네는 카잔 천황을 은밀히 다이리에서 벗어나게 했다. 미치카네는 천황이 도중에 걸음을 멈추지 말라고 설득하여, 야마시나의 간케이지까지 데려갔다. 천황은 엄구를 받고, 계도를 받은 다음, 출가했다. 그런데, 미치카네는 "아버지께 출가 전의 모습을 한번 보여드리고, 출가할 것을 고한 후에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절을 떠났다. 천황은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었고, 궁중에서는 카네이에와 형 미치타카가 동궁 즉위 준비를 일찌감치 마쳤다. 다음 날 아침, 요시치카와 곤사츄벤 후지와라노 코레시게가 간케이지로 달려갔지만, 출가한 천황의 모습을 보고 절망하며, 자신들도 출가했다.

어린 야스히토 친왕이 즉위했다 (이치조 천황). 외할아버지 카네이에는 섭정을 맡았다. 카네이에의 아들들도 승진되었고, 공로자인 미치카네는 그 해 7월, 참의가 된 것을 시작으로, 10월에는 종3위 곤츄나곤에, 11월에는 정3위, 에이엔 원년 (987년)에는 종2위, 에이소 2년 (989년)에는 정2위 곤다이나곤으로 승진가도를 달렸다.[3]

쇼랴쿠 원년 (990년), 카네이에가 병으로 사망하자, 후임 관백으로는 맏형 미치타카가 맡았다. 『오오카가미(大鏡)』에 의하면, 미치카네는 자신은 아버지에게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관백을 이어야한다고 바랬는데, 미치타카가 후계자로 된 것을 몹시 미워하며, 아버지 상중인데도 손님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6]

미치타카 정권 하에서, 쇼랴쿠 2년 (991년) 내대신, 쇼랴쿠 5년 (994년) 우대신으로 승진했다.

조토쿠 원년 (995년), 관백 미치타카가 중병으로 인해 병석에 누웠다. 미치타카는 후임 관백을 적남이자 내대신을 맡고 있던 코레치카에게 물려주고자 했지만, 허가받지 못하였고, 4월 10일에 사망했다. 4월 27일에 미치카네는 관백 선하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치카네는 병에 걸렸고, 5월 8일일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세간에는 "'''7일 관백'''" (재임은 7일이 아니다. 일설에는 5월 2일에 슈케이 (천황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관백으로서 첫 참내) 한지 7일째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고 불려졌다. 또한, 미치카네는 관백 재임 중에 딱 한번 진정을 개최했다[4]고 불려졌다. 사후 정1위 태정대신으로 추증되었다.

2. 2. 미치타카 정권 시기 (990년 ~ 995년)

에이간 2년 (984년) 8월, 카잔 천황이 즉위하면서 쿠로우도 사쇼벤이 되었다. 간나 2년 (986년) 6월 23일, 미치카네는 카잔 천황을 출가시키고, 어린 야스히토 친왕이 즉위하는데 공을 세웠다.[2] 이 공로로 미치카네는 쿠로우도노토에 임명되었고, 이후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쇼랴쿠 원년 (990년), 후지와라노 카네이에가 사망하자, 그의 맏형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관백이 되었다.[6] 미치카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공이 크다고 여겨 관백직을 기대했으나, 미치타카가 후계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상중에도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미치타카 정권 하에서도 미치카네는 쇼랴쿠 2년 (991년) 내대신, 쇼랴쿠 5년 (994년) 우대신으로 승진했다.

조토쿠 원년 (995년) 4월, 관백 미치타카가 사망한 후, 미치카네는 관백에 임명되었으나, 곧 병으로 사망하여 '7일 관백'이라 불렸다.[3]

2. 3. 7일 관백 (995년)

후지와라노 미치카네는 에이간 2년(984년) 8월, 카잔 천황의 즉위와 함께 쿠로우도 사쇼벤이 되었다.[2] 동궁에는 동복 여동생 센시가 생모인 야스히토 친왕이 있었으나, 카잔 천황은 카네이에의 사망한 형 코레타다의 딸 카이시가 생모였기에, 카네이에는 야스히토 친왕의 조속한 즉위를 바라고 있었다. 카잔 천황은 총애하던 뇨고 후지와라노 시시(忯子)가 사망하자, 미치카네는 간케이지 (카잔지)의 엄구와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출가를 권했다.[2]

간나 2년(986년) 6월 23일, 미치카네는 카잔 천황을 은밀히 다이리에서 벗어나게 하여 야마시나의 간케이지까지 데려갔다. 그러나 미치카네는 출가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아버지에게 출가 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핑계로 절을 떠났고, 그 사이 카네이에와 형 미치타카는 동궁 즉위 준비를 마쳤다.[2]

어린 야스히토 친왕이 즉위하고, 외할아버지 카네이에가 섭정을 맡았다. 미치카네는 그 해 7월 참의를 시작으로, 곤츄나곤, 곤다이나곤으로 승진했다. 쇼랴쿠 원년(990년) 카네이에 사망 후, 미치타카가 관백이 되었으나, 미치카네는 내대신, 우대신으로 계속 승진했다.

조토쿠 원년 (995년), 관백 미치타카가 중병으로 사망하자, 4월 27일 미치카네가 관백이 되었다. 그러나 곧 병에 걸려 5월 8일에 35세로 사망했다.[10] 세간에는 "7일 관백"으로 불렸으며, 재임 중 단 한 번 진정을 개최했다.[11] 사후 정1위 태정대신으로 추증되었다.[3]

3. 인물

『에이가모노가타리(栄花物語)』에서는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외모에 대해 "혈색이 좋지 않고, 털이 많고 추했다"[12][5]는 혹평을 받았다. 성격에 대해서는 『오오카가미(大鏡)』에서 "매우 냉혹하여,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받았다"[13][6]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귀찮고 심술궂으며, 장유의 순서도 분별하지 못하고, 형인 미치타카를 항상 타이르는 듯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품행도 좋지 않아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많은 "좋지 않은 일"을 했다고도 한다. 이처럼 인격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평가하는 한편, 『에이가모노가타리』에서는 어른스럽고 남자다운 인물로도 평가하고 있다.[12] 그러나 『오오카가미』, 『에이가모노가타리』는 모두 미치카네 사후에 쓰여진 문서이며, 역사이야기로서의 각색이나 허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술들이 실제 미치카네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영화이야기』에서는 미치나가와 친밀하여 미치타카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던 미치나가가 미치카네의 죽음 때에는 매우 슬퍼하며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영화이야기』는 예외적으로 하나야마 천황의 출가에 미치카네를 시작으로 하는 가네이에 일가가 관여했다는 기술이 없다.

61세에 사망한 아버지 가네이에, 62세에 사망한 동생 미치나가가 와카를 많이 남기고 있는 반면, 34세에 사망한 미치카네는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인지, 생전의 시는 『후습유화가집(拾遺和歌集)』과 『속고금화가집(続古今和歌集)』에 수록된 두 수를 포함하여 세 수가 현존하는 것에 그친다. 한편, 미치카네의 주변에는 많은 가인들이 있어, 후지와라노 사네카타·후지와라노 긴토·후지와라노 스케유키·미나모토노 가네즈미 등은 미치카네의 저택에 시종하며 자주 시를 지었다. 미치카네는 풍류를 다한 아와타 산장에 가인들을 모아 시제를 내고 시를 짓게 하는 일도 많았다.

4. 가계

후지와라노 카네이에를 아버지로, 후지와라노 나카마사의 딸 후지와라노 토키히메를 어머니로 두었다.[14] 정실은 후지와라노 토오카즈의 딸이었으나, 훗날 후지와라노 아키미츠의 아내가 되었다. 장남은 후쿠아시기미(福足君) (? - 989)이고,[14] 차남은 후지와라노 카네타카 (985 - 1053), 3남은 후지와라노 카네츠나 (988 - 1058)이다. 이 두 아들의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쿠니미츠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4남은 후지와라노 카네노부이다. 차녀 니죠도노노오카타(二条殿御方)는 후지와라노 이시의 뇨보가 되었다.[15]

후지와라노 모로스케의 딸 후지와라노 한시를 아내로 맞아, 장녀 후지와라노 손시 (984 - 1022)를 낳았다. 후지와라노 손시는 이치조 천황뇨고가 되었으며, 훗날 후지와라노 미치토오의 아내가 되었다. 생모 미상의 자녀로는 텐지 (? - 1012)라는 딸이 있었다.[16]

후지와라 북가 미치카네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미치카네'''

┣━━━━━┳━━━━━┓

카네타카  카네츠나  카네노부



카네후사



소엔 (우츠노미야씨)

미치카네의 아들 카네타카 이후에는 공경에 오른 인물이 없으며, 시모츠케 국의 호족 우츠노미야 씨는 카네타카의 손자 후지와라노 소엔의 자손이라고 전해진다.

5. 미치카네가 등장하는 작품


  • 빛나는 너에게 (2024년, NHK대하드라마) - 배우 타마오키 레오

참조

[1] 웹사이트 Fujiwara no Michikane • . A History . . of Japan . 日本歴史 https://historyofjap[...] 2023-03-07
[2] 문서 まかりいでゝ、おとゞにもかはらぬ姿今一度見え、かくと案內も申して必ず參り侍らむ
[3] 서적 一条天皇 吉川弘文館
[4] 간행물 『小右記』長和2年1月26日条
[5] 간행물 『栄花物語』巻第三,さまざまのよろこび
[6] 간행물 『大鏡』第四巻,右大臣道兼
[7] 간행물 『小右記』永祚元年8月13日条
[8] 간행물 『栄花物語』(巻第14,あさみどり)
[9] 간행물 『御堂関白記』寛弘9年3月26日条
[10] 서적 一条天皇 요시카와 홍문관
[11] 간행물 『小右記』 조와 2년 1월 26일조
[12] 간행물 『栄花物語』 권 제3, 여러가지 기쁨
[13] 간행물 『大鏡』 제 4권, 우대신 미치카네
[14] 간행물 『小右記』 에이소 원년 8월 13일조
[15] 간행물 『栄花物語』 (권 제14, 아사미도리)
[16] 간행물 『御堂関白記』 간코 9년 3월 26일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